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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시는 문정희 시인의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입니다. 우리는 입술을 열어 수많은 말의 성찬을 쏟아냅니다.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나의 사랑을 고백한 적이 있다면 아마 해지는 풍경을 바라볼 때 일 겁니다. 오늘을 여는 어둑새벽보다 나의 모든 것이 훤히 드러나 보이는 벌건 대낮보다 하루해가 저무는 저녁. 우리 모두 입술을 열어 죽음도 어찌 못하는 우리의 사랑을 고백해 볼 일입니다.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 문정희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면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숨죽여 홀로 운 것도 그때였을 것이다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을지도 몰라
해가 다시 떠오르지 않으면
당신을 못 볼지도 몰라
입술을 열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면……
한 존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을
꽃 속에 박힌 까아만 죽음을
비로소 알며
지는 해를 바라보며
나의 심장이 지금 뛰는 것을
당신께 고백한 적이 있다면……
내가 입술을 가진 이래
절박하게 허공을 두드리며
사랑을 말한 적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해가 질 때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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