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 박철
막힌 하수도 뚫은 노임 4만 원을 들고
영진설비 다녀오라는 아내의 심부름으로
두 번이나 길을 나섰다
자전거를 타고 삼거리를 지나는데 굵은 비가 내려
럭키슈퍼 앞에 섰다가 후두둑 비를 피하다가
그대로 앉아 병맥주를 마셨다
멀리 쑥국 쑥국 쑥국새처럼 비는 그치지 않고
나는 벌컥벌컥 술을 마셨다
다시 한번 자전거를 타고 영진설비에 가다가
화원 앞을 지나다가 문밖 동그마니 홀로 섰는
자스민 한 그루를 샀다
내 마음에 심은 향기 나는 나무 한 그루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가 찾아오고
거친 몇 마디가 아내 앞에 쏟아지고
아내는 돌아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나는 웃었고 아내의 손을 잡고 섰는
아이의 고운 눈썹을 보았다
어느 한쪽,
아직 뚫지 못한 그 무엇이 있기에
오늘도 숲속 깊은 곳에서 쑥국새는 울고 비는 내리고
홀로 향기 잃은 나무 한 그루 문밖에 섰나
아내는 설거지를 하고 아이는 숙제를 하고
내겐 아직 멀고 먼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출처 : 박철 시집 『영진설비 돈 갖다 주기』 문학동네(2001년)
* 이 남자 참 대책이 없습니다. 영진설비 돈 갖다주기가 그렇게 힘든가요. 아내의 심부름으로 영진설비에 하수구 뚫은 노임 갖다 주려가다 비가 온다는 핑계로 슈퍼에 앉아 노임 돈으로 맥주를 사서 마십니다. 그다음에 또 화원 앞을 지나다 또 노임 돈으로 자스민 한 그루를 사네요. 마침내 영진설비 아저씨 찾아와 아내에게 거친 말 쏟아냅니다. 오늘 밤 이 사내 무사할까요. 아마 이 웬수하고 등짝 스매싱을 당하고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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