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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시는 저의 세 번째 시집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실린 ‘눈사람’입니다.
눈사람 / 이권
엄마 아빠가 눈 내리는 밤을 밤새 굴려 나를 만들어냈어요. 계획에 없던 일이라 즉흥적으로 나를 만들어 세상에 내어놓았나 봐요. 가끔 심술을 부리고 어깃장을 놓을 때마다 엄마 아빠는 자기들을 하나도 닮지 않은 불량한 새끼라고 욕을 했어요. 매일 싸움만 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눈사람 하나 만들어주지 않는 가난한 엄마 아빠가 나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요. 어제는 온종일 눈이 내렸어요.
송이송이 쌓이는 함박눈과 하얀 어둠을 뭉쳐 눈사람을 만들었어요. 숯검정을 가져다 눈과 코와 입을 그려 넣었어요. 빨간 모자도 씌워주고 노랑 목도리도 둘러주었어요. 콘돔을 끼워줄까 하다 그만두었어요. 날이 밝자 눈사람은 빨간 모자와 노랑 목도리를 벗어둔 채 첫사랑 애인처럼 인사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어요. 오늘은 동구 밖에 나가, 오지 않는 이를 온종일 마중하는 하얀 눈사람이나 되어야겠어요.
* 이권 시집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아실. 2023.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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