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할 시는 시인이자 노동운동가인 백무산 시인의 ‘동해 남부선’이다. 어느 바닷가 간이역. 기차가 서고 어느 한 아이를 부려놓고 기차는 떠나는데 꿈결처럼 지난날 한 아이가 차창 옆을 스친다. 벌써 어른이 되어 아이 둘을 걸리고 한 아이는 업고 양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며 손이라도 잡아보고 인사라도 건네야 하는데, 저 무거운 짐을 들어주어야 하는데, 동해남부선은 남으로 남으로 떠난다.
동해남부선 / 백무산
바닷가가 보이는 작은 역에 기차는 서네
이제 막 다다른 봄볕을 부려놓고
동해남부선은 남으로 길게 떠나는데
방금 내 생각을 스친, 지난날의 한 아이가
바로 그 아이가, 거짓말처럼 차에서 내려
내 차창 옆을 지나가고 있네
아이를 둘씩이나 걸리고 한 아이는 업고
양손에는 무거운 짐을 들고
내가 예전에 이곳 바닷가에서 일하던 때
소나기에 갇힌 대합실에서 오도가도 못하던 내게
우산을 씌워주고 빌려주던 아이
작은 키에 얼굴은 명랑한데
손은 터무니없이 크고 거칠었던 아이
열일곱이랬고 삼양라면에 일 다녔댔지
우산을 돌려주러 갔던 자취방 앞에서
빵봉지를 들려주다 잡고 놓지 못했던 손
누가 저 아이 짐 좀 들어주오
기차는 떠나는데
봄볕이 저 아이 이마에 송글송글 맺히는데
누가 제발 저 아이 짐 좀 들어주오
* 백무산 시인은 경북 영천에서 1955년 태어났다. 1974년 현대중공업 생산직으로 입사하여 노동운동을 했다. 1984년 「민중지」 ‘지옥선’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박노해 시인과 함께 1970년〜 1980년대를 대표하는 노동자 시인이다. 대표작으로 ‘손님’ ‘세한도’ ‘그대에게 가는 모든 길’ 등이 있다.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오장환문학상,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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