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오늘 소개할 시는 저의 세 번째 시집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실린 ‘신발 상위시대’입니다.
신발 상위시대 / 이권
빨주노초파남보 온갖 신발들이 떠돌아다니는 거리. 가만히 바라보면 신발에도 계급이 있다. 반짝반짝 물광이 빛나는 겉만 번지르르한 신사화도 있고, 콧대 높은 줄 모르고 자꾸만 솟아오르려는 칼힐도 있다. 바람이 뻥튀기한 구두보다도 비싼 나이키 운동화도 있고, 어느 산골 오두막집에서 철모르고 내려온 듯한 타이아표 검정 고무신도 있다.
집에 들어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어 아예 집을 버리고 나온 맨발에 슬리퍼가 있고, 동네 양아치에게 삥 뜯기고 훈계를 듣는 가엾은 꽃신도 있다. 그동안 고생했다며 직장에서 명퇴당한 한없이 구차해진 신발도 있다. 교도소 담벼락에 갇혀 수십 년 동안 징역살이나 하는 말표 흰 고무신도 있고, 사랑에도 호구가 있는지 십 리도 못 가서 그만 발병이 난 신발도 있다.
모든 것 놓아버리고 죽은 듯이 며칠 푹 잠이나 자다 나오고 싶은 신발도 있고, 지구 밖으로 달아나 다시는 이 세상에 돌아오고 싶지 않은 신발도 있다. 나이키와 아디다스와 뉴발란스 외래종 운동화에 발마저 빼앗긴 사람들. 신발의 말에 복종하고, 신발을 상전 모시듯 섬기는, 신발이 사람을 길들이는 신발 상위시대가 되었다.
* 이권 시집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아실. 2023. 03.
https://link.coupang.com/a/SBd98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728x90
반응형
'이권 세 번째 시집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변두리 / 이권 (150) | 2024.01.05 |
---|---|
당분간 나를 휴업할까 합니다 / 이권 (45) | 2023.12.31 |
호갱님 전 상서 / 이권 (185) | 2023.12.21 |
시(詩) 마술이 필요한 시간 (109) | 2023.12.19 |
딱 한 번이라는 말 / 이권 (130) | 2023.12.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