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할 시는 저의 첫 번째 시집 『아버지의 마술』에 수록된 386 Computer 입니다.
386 Computer / 이권
386 메모리와 격정의 시대를 탑재한 주인님 F1을 누르시고 잠시 기다려 주시면 늘 버걱거리는 주인님 생에 대해 몇 가지 도움말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육십 평생 압축해 놓았던 주인님 생애를 알집을 통해 풀어드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문장을 몰래 복사해 주인님 문장에 붙여 넣기를 시도한 흔적이 주인님 주름진 얼굴에서 발견되는군요. 차마 발설할 수 없었던 주인님의 치욕스런 문장은 여러 경로에 암호를 걸어 놓으신 채 숨겨 놓으셨고요.
수기 문서로 생을 계산하던 시대는 이미 박물관에 들어가 있지요. 엑셀의 함수에 주인님 사주팔자를 입력해보세요. 지금 사귀고 있는 늙은 애인과의 속궁합도 보아 드리고 불확실한 미래의 운명도 예측해 드릴 수 있습니다. 포토샵으로 주인님의 일그러진 얼굴을 젊은 날의 이미지로 수정 편집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멀티미디어로 화려하게 고난의 시대를 탑재한 주인님 개천에서 용 난다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이제 어느 생의 메뉴로 이동할까요? 약간의 돈과 시간을 투자하시어 주인님의 인격과 명예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보세요. 그동안 주인님 전과가 기록된 흉흉했던 시간을 다시는 복구할 수 없도록 영구히 삭제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생 신분 세탁하지 않으면 5초 후에 주인님의 생은 자동으로 종료됩니다. 이제 더 이상의 접근은 불가합니다
*이권 시집 『아버지의 마술』 애지. 201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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