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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에게 반하다.
이권 첫 번째 시집 『아버지의 마술』

고라니 / 이권

by 시(詩) 배달부 2024.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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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생태공원 제공.

 

 오늘 소개할 시는 저의 첫 번째 시집 『아버지의 마술』에 실린 ‘고라니’입니다.

 

 

고라니 / 이권

 

 

  손바닥 하나로 하늘이 반쯤 가리는 마을 다랑논에 물고기 잡는 그물이 처져있습니다. 산안개 낀 초저녁 푸른 숲을 헤엄쳐 내려오는 고라니를 잡기 위해서지요. 그러나 매번 허탕입니다. 누구보다 논두렁의 내력을 훤히 알고 있는 고라니 눈 속으로 단번에 길의 허점과 퇴로의 방향이 들어왔기 때문이지요. 보슬비 지나간 어젯밤 논두렁에 갓 피어오는 서리태의 새순이며 채마밭의 얼갈이를 모두 뜯어 먹고 발자국 몇 개를 증표로 남겨 놓고 사라졌습니다.

 

  한 구덩이에 콩 세 알을 심는다는 할머니 한 알은 새와 들짐승 몫이고 또 한 알은 벌레들의 몫 그리고 한 알이 사람 몫인데 모두 다 뜯어 먹었다며 궁시랑 혼잣말을 주고받습니다. 어느 날 고라니가 나뭇잎 하나 물고 와 여기가 자기네 살던 종중 땅이라며 고라니 증조할아버지가 느티나무 이파리에 써 놓은 땅문서를 내민다면 대책이 없을 것이라 했습니다.

 

  어쩌면 먹을 것을 찾아 산에서 마을로 내려오는 고라니나 바람 부는 날 아파트 신축 공사장 타워 크레인을 운전하기 위해 그물코 같은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막내아들이나 위험하기는 매한가지라 했습니다. 모든 삶이 저렇게 아슬아슬하게 하루하루를 위험 속으로 건너가는 것이라 했습니다. 오늘은 바람도 불지말고 고라니도 내려오지 말라며 고라니 발자국을 따라 콩을 심는 할머니. 그믐달처럼 휘어져 있습니다.

 

* 이권 시집 『아버지의 마술』 도서출판 애지 201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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