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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시는 저의 첫 번째 시집 『아버지의 마술』 에 수록된 '바람의 행로' 입니다.
바람의 행로 / 이권
지금까지 나를 이끌고 온 것은 계절마다 색깔을 바꾸는 무지갯빛 바람이었어요. 오늘도 나의 방랑을 부추기고 있는 바람은 밤새 흔들리던 코스모스의 꽃잎에서 걸어 나온 하늬바람일 거예요. 지난밤 아버지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요. 갈대밭에 불던 바람이 허공에 무덤을 만들고 아버지 발걸음을 파묻고 왔을 거예요. 아버지 발걸음은 늘 바람이었어요. 바람 따라왔다가 바람 따라가 버렸거든요.
지금쯤 바람은 내 몸 어디까지 밀고 들어 왔을까요? 통풍 든 무릎을 지나 시도 때도 없이 부풀어 오르는 아랫도리를 지나 바람 든 허파까지 들어 왔을 거예요. 바람은 항상 골목길과 내통하는 내연의 관계를 지니고 있어요. 골목길에 부는 바람의 방향과 바람의 질량을 측량해 오늘의 일기예보를 내놓게 되지요.
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많은 애인이 생겨났고 수많은 그녀들이 떠나갔어요. 지금은 바람을 마중 나갈 시간. 오늘도 아내는 출렁이는 치마폭만큼 바람이 날 것이고요. 나는 역마살 낀 사주팔자만큼 바람이 날 거예요. 바람의 나들목. 항상 도망을 궁리하는 나는 수 세기 전 춘향이의 치마자락에 불던 바람의 아들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이권 시집 『아버지의 마술』 애지. 2015.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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