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소개할 시는 이문재 시인의 ‘오래된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엄숙한 장소의 종교의식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오래된 기도’를 읽다 보면 기도라는 게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손을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조용히 그의 소리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기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촛불 한 자루 밝혀 놓고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어도 기도가 되는 이문재 시인의 ‘오래된 기도’입니다.
오래된 기도 /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 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 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 이문재 시인은 1959년 경기도 김포(현재 인천 서구)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82년 『시운동』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마음의 오지』, 『제국호텔』 등이 있다. 김달진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지훈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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