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이권 첫 번째 시집 『아버지의 마술』60 고라니 / 이권 오늘 소개할 시는 저의 첫 번째 시집 『아버지의 마술』에 실린 ‘고라니’입니다. 고라니 / 이권 손바닥 하나로 하늘이 반쯤 가리는 마을 다랑논에 물고기 잡는 그물이 처져있습니다. 산안개 낀 초저녁 푸른 숲을 헤엄쳐 내려오는 고라니를 잡기 위해서지요. 그러나 매번 허탕입니다. 누구보다 논두렁의 내력을 훤히 알고 있는 고라니 눈 속으로 단번에 길의 허점과 퇴로의 방향이 들어왔기 때문이지요. 보슬비 지나간 어젯밤 논두렁에 갓 피어오는 서리태의 새순이며 채마밭의 얼갈이를 모두 뜯어 먹고 발자국 몇 개를 증표로 남겨 놓고 사라졌습니다. 한 구덩이에 콩 세 알을 심는다는 할머니 한 알은 새와 들짐승 몫이고 또 한 알은 벌레들의 몫 그리고 한 알이 사람 몫인데 모두 다 뜯어 먹었다며 궁시랑 혼잣말을 주고.. 2024. 7. 8. 아름다운 멸망 / 이권 오늘 소개할 시는 저의 첫 번째 시집 『아버지의 마술』 에 수록된 ‘아름다운 멸망’입니다 아름다운 멸망 / 이권 복사꽃 환한 봄날 나는 죽을 것이다 아내는 고생만 하다 살 만하니 갔다며 살아서도 인정 없는 사람이더니 인정 없이 갔다고내 죽음에 밑줄을 치고 있을 것이다 친구들은 부조, 돈 오만 원 내놓으면서 언제 갚을 거냐고 자기들이 밑진 장사라며 킬킬거리며 고스톱이나 치고 있을 것이다 주치의는 세상을 분탕질해놓고 청소도 안 해 놓고 갔다며 세상이 조금은 깨끗해진 것 같다고 축 사망이라고 적어 놓을 것이다 국화꽃으로 나를 환하게 수식하고 있는 영정정성스레 만수향 사르고 술 한 잔 따르며 내가 나에게 큰절을 올릴 것이다 그동안 고생했다며 내 죽음을 쓰다듬으며내가 나의 멸망을 축하해 줄 것이다 *이권 시집.. 2024. 6. 25. 나를 복사하다 / 이권 나를 복사하다 / 이권 날갯죽지가 고장이 났다 무리하게 세상을 날다 인대가 늘어났다고 했다. 의사 선생은 고장의 원인을 알고 싶으면 모든 비밀을 판독 할 수 있는 MRI를 찍어보라 했다. 우주선의 신호음 같은 주파수가 내 몸 곳곳에 채워진 빗장을 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내 몸속을 흐르던 음탕한 색기色氣까지 판독해보고 시시각각 반역을 꿈꾸는 심혈관의 뜨거운 맥박까지 그래프로 삐틀삐틀 그려내고 있었다. 아랫도리에 숨겨 논 비밀은 없는지 자꾸만 내 사타구니를 더듬고 있는 MRI. 의사 선생은 내구연한이 지나 더 이상 날개가 돋아나지 않는다며 이제는 하늘을 날 수 있는 꿈을 꿀 수 없다고 했다. 나를 수 없이 복사해갔던 아내가 또 무엇을 훔쳐내려는지 꿈속에서 내 몸을 자꾸만 뒤지고 있었다. *이권.. 2024. 6. 6. 저녁 무렵 / 이권 오늘 소개할 시는 저의 첫 번째 시집 『아버지의 마술』에 수록된 ‘저녁 무렵’입니다. 저녁 무렵 / 이권 모내기 전 다랑논에 논물이 괴어 있다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내려와 있다 집 넘어 감나무에 어둑어둑 저녁이 찾아왔다 물꼬를 보러 갔던 아버지가 대문을 들어서자 집안까지 어둠이 따라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다는 듯전봇대에 등불 몇 개 내걸렸다 이미 어둠이 된 네가 더 캄캄해진 나를 바라보고 있다 울 밖, 개구리 울음소리가 지천이다 *이권 시집 『아버지의 마술』 애지. 2016.06. 2024. 5. 26. 마가렛 꽃 / 이권 오늘 소개할 시는 저의 첫 번째 시집 『아버지의 마술』에 수록된 ‘마가렛 꽃’ 입니다. 마가렛 꽃 / 이권 비 그친 오후 하늘공원 가는 길 마가렛 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겨우내 꽃의 빛깔을 고르고 꽃잎의 각도와 길이를 맞추었을 마가렛꽃 꽃잎 가장자리에부터 흰색을 칠하고 꽃술에 노란 황금을 입히는 꽃단장이 한창이다 그녀의 꽃받침으로 서 있는 동안 꽃잎 몇 개가 떨어져 내렸다 가끔 휘청거리는 나에게 어깨를 내어 주기도 하던 그녀 마가렛 꽃을 닮아갔다 온몸이 식물도감같이 사시사철 잎과 꽃이 돋아나는 여자 너무 부끄러운 혼인색을 지녀 나비의 발자국이 온몸에 남는 여자 내 꽃밥이 꽃실을 타고 그녀의 씨방으로 옮겨져 밑씨가 되어가는 사이 나는 그녀와 똑같은 향기와 색깔을 갖는다 너와 내가 하나인 암수가 하나인.. 2024. 5. 17. 건들장마 / 이권 오늘 소개할 시는 저의 첫 번째 시집 『아버지의 마술』에 수록된 ‘건들장마’입니다. 건들장마 / 이권 건들장마 속 작달비가 지나간 아침 무 싹이 손톱만큼 올라와 있다 배추벌레가 사각사각 아침 요기를 끝낸 배추잎 푸른똥 몇 개 점점이 놓여 있다 어미젖을 물고 있는 애호박의 몸무게는 닷 돈가량 늘어났고 갓 뒷물을 끝낸 며느리밑씻개 잎은 축축이 젖어있다 방아깨비가 한 홉 정도의 가을을 찧어내고 있고 막내 조카 영희 가슴이 자두 알 만하게 올라와 있다 3조 2교대 야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내 턱수염은 한 치 정도 자라 있고 허리는 어제보다 1도 정도 휘어져 있다 하늘은 뻐꾸기 울음소리로 반쯤 젖어 있고 세상은 어제보다 말가웃 더 늙어졌다다 건들건들 지나간 건들장마 탓이다 *이권 시집 『아버지의 마술』 애.. 2024. 5. 8. 아내의 사계四季 / 이권 오늘 소개할 시는 저의 첫 번째 시집 『아버지의 마술』에 수록된 아내의 사계입니다. 아내의 사계四季 / 이권 이른 아침 라디오에서 비발디의 사계가 흘러나오고 있다. 잠에서 깨어난 아내, 내게 손을 뻗쳐 오고 있다. 느슨하게 풀리는 아내의 몸을 고르고 현을 맞추는 것은 나의 오래된 습관, 아내의 몸에는 언제든지 계절의 흐름을 연주할 수 있는 바이올린이 숨겨져 있다. 아내를 연주하기 위해서는 부드럽고 섬세하게 활을 켜야 한다. 아직은 서로가 서로를 탐색 중 아내의 치골에 감겨있던 바이올린 3번 현을 누르자 동그랗게 몸을 말아 올리며 팽팽히 감겨오는 아내. 살랑살랑 바람이 일고 아내의 몸속에서 물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발디의 사계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자 아내의 몸에 먹장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 2024. 4. 28. 파안대소 / 이권 오늘 소개할 시는 저의 첫 번째 시집 『아버지의 마술』에 실린 ‘파안대소’입니다. 파안대소 / 이권 동인천에서 을왕리 해수욕장 가는 버스 안 아이 엄마는 차창 밖 보고 있고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나를 보며 웃고 있다 갓 피어난 꽃 한 송이 내밀고 있는 아이 그 웃음이 환하게 내 몸으로 번진다 목젖이 다 보이도록 파안대소하는 바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꽉 찬 웃음이다 하늘 한쪽이 기어코 무너져 내린다 웃음은 몸이 피워내는 또 하나의 꽃 웃음처럼 아름다운 꽃을 본 적이 없다 *이권 시집 『아버지의 마술』 애지. 2015. 06. 2024. 4. 22. 수상한 계절 / 이권 오늘 소개할 시는 저의 첫 번째 시집 『아버지의 마술』 에 수록된 '수상한 계절'입니다. 수상한 계절 / 이권 헤어진 애인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선이 가느다랗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울고 있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나는 전화선 너머 그녀의 목소리를 가만히 매만지고 있었습니다. 아직도 나는 너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잠시 빛나고 있었습니다. 지난가을 낙엽 쌓인 거리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습니다. 나를 사랑한다며 낯선 사내의 흔적이 있는 그녀의 집으로 나를 불러들였습니다. 나는 그녀의 문간방에 세간을 들이고 살림을 차렸습니다. 꽃피는 계절로 들어서자 그녀한테 새로운 남자가 생겼다고 했습니다. 그녀에게 봄에 잘 어울리는 새로운 사내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계절이 바뀌어서 어쩔 .. 2024. 4. 12. 꽃의 쿠데타 / 이권 꽃의 쿠데타 / 이권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하고 키스처럼 매혹적인 쿠데타 꽃들이 명명한 d-day 이가 다가오고 있다 반란군의 암구호는 개구리발톱과 꿩의바람꽃 초록의 반란군 붉은 꽃대를 밀어 올리며 건너편 강가에 진을 치고 있다 물총새가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꽃들이 횃불을 켜는 어둑새벽 강을 도하하는 반란군 그녀는 반란의 수괴가 되어 꽃의 맨 앞에 서 있다 봄이 되어도 나비 한 마리 불러들이지 못한 나의 사유지는 반란군에 의해 전격 점령된다 봄을 간음한 혐의로 나는 그녀에게 긴급 체포된다 반란은 꽃으로부터 시작되어 그녀에까지 번진 뒤 나에게 돌아왔다 하루에도 수없이 새로운 공화국이 탄생하고 멸망하는 봄, 사방이 온통 핏빛이다 *이권 시집 『아버지의 마술』 애지. 2015.06. 2024. 4. 3. 꽃 공양 / 이권 꽃 공양 / 이권 법당 안이 또르르 구르는 굴림 목탁 소리로 가득합니다 모두 관세음보살을 호명하며 관음기도에 열중입니다 법당 앞 백일홍도 꽃송이를 끌어모아 꽃 공양을 올리고 감나무에 앉아 있는 까치도 목울대 밀어 올리며 음성공양이 한창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을 연호하며 내 곁을 스쳐 간 여인들의 대자대비를 생각합니다 관세음보살과 동침하고 나면 남순동자 같은 어여쁜 아이 하나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도 나를 부르시는 관세음보살님 당신을 우러러 바라보며 조용히 또 다른 관세음보살을 호명해봅니다 영희, 순복이, 지연이 내 곁에 머물다간 관세음보살이었습니다 *이권 시집 『아버지의 마술』 2015. 06. 2024. 3. 24. 봄날 / 이권 오늘 소개할 시는 저의 첫 번째 시집 『아버지의 마술』에 수록된 ‘봄날’입니다. 봄날 / 이권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줄 알았다 어제저녁 하늘로 올라가는 물소리를 밤새 듣고서야 민들레는 민들레 키만큼 미루나무는 미루나무의 높이만큼 소나무는 소나무의 솔잎 수 만큼 산수유는 산수유의 꽃만큼 물줄기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아지랑이 부피만큼 봄 들판도 봄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물오르는 소리에 흠뻑 젖어 있던 나도 내 나이만큼의 봄을 끌어 올렸다 물오르는 소리로 봄날 오후가 부산하였다 *이권 시집 『아버지의 마술』 애지. 2015. 06. https://link.coupang.com/a/UyWuN 아버지의 마술:이권 시집 COUPANG www.coupang.com 2024. 3. 17. 이전 1 2 3 4 5 다음 728x90 반응형